한산대첩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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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

통제영지(사적 제 402호)

통제영은 삼도수군 통제영의 약칭으로 삼도수군 통제사가 경상 · 전라 · 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 · 통할하던 본영을 이른다.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이 연전연패하던 육군과는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연전연승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킴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를 구한다. 이에 선조는 이듬해에 당시 직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리고 장군으로 하여근 삼도수군을 통할하게 한다.

지정구역내 관청과 학교의 이전에 맞추어 법원 · 검찰청사 터에는 운주당 · 경무당 · 내아 · 병고등을 복원하고 통영초등학교 부지에는 백화당과 12공방등을 통영세무서 자리에는 중영 · 중영내아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약 300년동안 삼남을 호령하던 남해의 관방 통제영의 위용을 재현함으로써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명미한 자연풍광과 함께 어우러지게 통영의 면모를 가다듬고 21세기를 향한 웅비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7년의 난동안 이순신의 피와 눈물이 헤아릴 수 없이 배인 것이며, 왜적과 싸우면서 틈틈이 계속하여 쓴 것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여 390여년을 간직해 온 것이다. 이것은 『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내용 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에 대해 연구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다 새로이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나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거제도 오아포, 고성현 춘원포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 선조 37년(1604) 9월9일 윤허를 받은 이경준 제 6대 통제사가 이 고장 두룡포에 통제영을 이설하면서부터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된다. 선조 38년(1605) 7월 14일,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 세병관을 창건하고 차례로 통제영 관아를 지으니 통영은 이렇게 조선조 유일한[계획군사도시]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 후 속종4년(1678) 윤천뢰 제57대 통제사 때에 영문 주위의 산능선을 다라 높이 1장반(약 4.6m), 둘레 1만 1,730자 (약 3.6km),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과 2임문 그리고 3포루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개의 관아가 통제영의 위풍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성곽과 관아가 다 헐리고 지금은 통영성의 일부와 세병관이 겨우 남아 지난날의 영광을 쓸쓸하게 증언해 줄 뿐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통제영지가 계획대로 복원되면 이는 통영시만으리 긍지를 드높이는 [호국의 성지][관광의 명소]가 될것이다.

세병관(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제 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이 곳 두룡포로 옮겨온 1604년에 창건한 객사로서, 통제영의 상징적 건물이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으로 개방하였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 바닥의 중앙 일부를 한단 올려 놓았는데 여기에 전패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식이지만, 익공석 수법과 다포식 수법이 많이 보인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직접 환반을 놓아 주심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십일량가로서 대들보를 양쪽 내고 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보를 걸고, 다시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걸었다. 종보 위에는 대공을 세워 종도릴를 받치고 있다. 내고주와 전면 평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용마루, 합각마루,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였다.

두룡포기사비(지방유형문화재 제 112호)

세병관 경내 수항루 뒷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는 두룡포 기사비는 이경준 제 6대 통제사가 우리고장(당시 두룡포)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한 치적이 새겨진 통영의 뿌리를 밝히는 사적비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3년(1625)구인후 제 19대 통제사가 세웠는데, 당시 창원대도 호부사 박홍미가 지은 비문의 내용은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이경준 통제사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해안과 업적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통제영 남물밖의 바닷가 큰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무 8년(1904) 이곳 사람 이학재, 이승주 두 사람이 세병관 앞뜰에 옮겨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귀부가 없어진 듯하고 비신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오랫동안 비문의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다. 1996년 4월 12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비각을 짓고 하대를 새로 만들어 옮겨 세움으로써 1세기 만에 비신의 하부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수는 운문 위에서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느 ㄴ형상으로 조형미가 특히 뛰어나다.

통영 궁도의 도량장열무정

유혁면 40대 통제사의 뜻 이어 열무정이라 이름 붙여 1592년 4월 13일에 임진란이 일어나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의 직책으로, 겨앙우수영이 무너지자, 애적을 맞아 진을 한산도로 옮긴 다음해인 1593년 8월에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어 한산도를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삼았다. 1594년 (선조27년)무관인 한효순을 통제사의 휘하에 파견하여 수군 진영인 한산도에서 무과를 실시한 것이 통영 궁도의 효시가 된 것이다. 1603년 (선조 36년) 이경준 6대 통제사 때, 통제영을 현 통영으로 옮겼고 1656년 제 40대 통제사로 부임한 유혁연이 통영시 용남면 한정골 기슭에 처음으로 누각을 세우고 열무정이라 하였다. 이 열무정에는 매년 춘추로 충청, 전라, 경상 삼도를 통활하여 무과 시사장으로 삼아 왔으나 1896년(건양1년) 통제영이 폐영되고 열무정도 폐정디고 말았다.

1753년(영조29년) 제 114대 구선행 통제사가 부임하여 현 남망산 중턱에 남송정을 건립하여 궁도 도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왔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정이 퇴락하여 폐정이 될 지경에 이르런지 오래되자 본 군의 뜻 있는 선비 유지들이 서로 도아정을 중수하고 유명의 장사, 사졸, 궁사들이 모여 날마다 습사에 열중하니 당기는 화살마다 명중케되므로 나라의 안팎을 지키는 간성의 군사라 명성이 자자하자 협소한 남송정을 넓히고자 건물을 중축할 것을 의논하여 오던 중 본 군의 유지 송병문, 김영태, 김영팔, 박성오, 박성숙등이 적지 않은 재물을 희사하여 1870년(고종 7년) 가을에 준공하니 남망산 송림 사이에 사정이 우뚝 서게 되었다.

통영항 서남쪽으로 착량(판도)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임란때 대첩을 이룩한 한산섬 앞바다와 제승당이 있어 정에 오르면 윤환의 풍경이 절경이라, 두루 바라보는 객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고장 선비 백남호, 김두옥, 송정택, 이부근등이 감동하여 정택 시를 짓고 부근이 글을 써서 남송정 네 기둥에 주련을 걸었다. 남송정은 통영 궁도의 도량으로 오랜 역사 속에 이어 왔으나 나라의 운명과 함께 일제의 강점기 아래 사라질 운명에 이르렀으나, 1945년 나라의 광복과 함께 전국 궁도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어 통영에서도 도천동 해운정, 한산도 한산정 남망산의 남송정을 보수하고 정량동에 육각정을 세워 통영의 궁사들이 다시 일어섰다.

예로부터 남망산 송림은 나라에서 정한 금송림으로 아무나 베지 못하게 한 송림이다. 남송정 관척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싸여 있어 갈비(솔잎 낙엽) 채취하러 나왔던 부녀자가 빗나간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불상사가 1960년을 전후하여 두 차례에 이르자 통영군민의 거센 여론에 폐정을 면치 못하여 건물을 철거하게 된 목재와 1692년도에 철거된 통영시 용남면 사무소 목재 일부를 합하여, 통영궁도협회 김기석등이 주동이 되어 20여명 사우들의 협찬과 지방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총 공사비 2,798,730원으로 남망산 동편 언덕에 사정을 옮겨 건립하고 유혁 통제사의 뜻을 이어 열무정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