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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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460년대 ~ 1592년

조일전쟁 직전의 조선과 일본의 외교

1460년대 말, 일본에서는 '오닌의 난'이 일어나 각 지역 지배권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라 부른다.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준군, 오다노부나의 신임을 얻어 고위 다이묘로 출세하였다. 오다노부나기는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주코쿠로 출전하기 위해 교토 혼노사에 머물고 있을 때 그의 부하 아케치 미스히데에게 암살을 당했다.

센코쿠시대, 오년의 난(1467 ~ 1477)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스히데를 쳐부수고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120년간 계속 되어 오던 난세 일본을 종식시키고 1590년 일본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는 1587년 규슈 정벌을 마치고 일본 통일이 가시화 되었을 때 조선과의 교섭을 시작했다. 그는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에게 일본에 사신을 보내도록 명했다. 그러나 조선은 계속된 태평성대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통링에는 관심이 없는 터라 수로미매(水路謎昧) 즉 '일본 가는 물길이 어두워 사신을 파견할 수 없다'는 구차한 변명으로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였다. 이대가 임진란 전쟁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으니 조선이 통신사를 제대로 활용했다면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과 중국 명나라를 정복할 꿈을 가지 도요토미였다. 조선의 한차례 거절에 그만둘리 만무했다. 이번의 요구는 한발 더 나아가 조선을 일본에 입조(入朝)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가 죽자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의 요구를 받들고 승려 겐소 등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이것이 제 2차 일본 사신 파견이었다. 그들은 통신사 파견은 요청했지만,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는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 그말을 꺼냈다가는 조선의 노여움을 사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통신사 파견은 이루어 지지 않았고, 그들은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시작

잠시 쓰나미로 돌아갔던 그들은 다시 부산포로 건너와 통신사를 파견해주기를 통사정하기에 이르렀다. 도요토미의 명령을 이행치 못하면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통신사 파견 요구를 다시 접한 조선은 일본 해적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낸다면 응하겠다고 했다. 이에 쓰시마 도주는 부하를 보내 조선인 10여명을 잡아 조선에 바쳤고, 조선 조정은 그들을 모두 목 베어 죽였다. 그대로 조선은 통신사 파견을 미루다가 1590년 도요토미가 일본을 완전히 통일한 그해 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판견했다. 이때 조선 통신사로 파견된 사람이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황윤길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 했고 김성일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 보고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말을 그대로 따라 전쟁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1592년 4월 13일에 별다른 전쟁준비가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맞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1590년, 12년간 계속 되어 오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까지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침략전쟁의 교두보로 규슈 히젠에 나고야 성을 쌓았다. 1592년 1월5일, 나고야 성에 제 1군부터 16군까지 12만 7300명의 병력은 예비대로 편성하여 나고야 성에 주둔시켰다. 이해 4월 13일 조선 침략군 제 1진으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4월 18일 제 2진으로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차례로 부산포에 상륙하여 조 · 일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