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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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1592년대~1598년

개전초기 조선의 대응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부산에 상륙할 때 경상좌도 해역 책임 장수 박홍 경상좌수사는 각 진에 분산되어 있는 수군 병록을 집결시켜 싸워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부산 수영 본영을 버리고 피신하였다. 경상우도 책임 장수 원균 경상우사사는 전쟁발발 초기 일본 수군과 접전하여 적선 10여척을 쳐부수었으나 중과 부적으로 거제 오아포(동부면 오포리) 본영을 버리고, 사천방면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을 한번도 받지 않고 부산포에 상륙, ㅂ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헌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전쟁발발20일 만인 5월 2일 ,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하였다. 선조임금은 평양을 거쳐 평안도 의주로 피난하였고,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 같았다.

이순신 장군의 출전

충무공은 일본군 상륙 후 이틀째인 4월 15일 해질녘 경상 우수사 원균의 공문을 받고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라좌수군의 원군을 요청한 것에 대해 즉시 출동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 조정의 전략인 진관제때문이었다. 자신의 지역은 책임지고 지킨다는 나라가 세운 전략 때문에 '조정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병력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조정의 허락을 받은 후 출전하겠다.'는 요지의 답변을 원균 수사에게 하였다. 곧이어 경상도 바다로 출전하고자 하니 허락해 달라는 징계를 선조 임금에게 올렸다. 이에 조선 조정은 경상도 바다로 출전하여 적을 치라는 공문을 이순신에게 보냈다. 경상도 바다로 출전하기에 앞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공문을 보내 합류할 것을 요청하고 5월 4일 전라 좌수영(여수)을 출발했다. 원균함대와는 5월 6일 고성 땅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에서 만나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5월 7일 새벽에 출동하였다. 충무공의 제 1차 출동이었다. 전라 좌수군의 전력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직선46척이었다. 경상우수군의 전력은 판옥선 4척, 협선 2척이었다.

일본군의 대응

육전에서는 연일 전승했으나 해전에서 연패하여 그들의 계획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한강과 대동강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수륙병진 전략으로 우리나라를 완전히 정복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일본 규슈 나고야 성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연패소식을 듣고, 남해의 제해권 확보와 서해 진출 없이는 침략전쟁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일본 수군에게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조선의 수군장수 이순신을 젝하고 서해로 진출할 것을 명령한다.

한산대첩-제 3차 출동 두번 (한산도, 안골포)의 해전

일본 수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연합함대를 구성하기 이해 쿠키 요시다카,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키 야스하루 등 3명의 일본 수군 장수들이 김해에 모였다. 이대 세력이 제일 큰 와키자키 야스하루가 전공을 탐내어 몰래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단독 출전하여 7월7일 오후 2시쯤 견내량에 도착하였다. 이순신장군은 일본 수군이 대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남해바다로 진출할 것이라는 정보를 수집하고 1592년 7월 5일 전라 좌, 우도와 경상우도의 수군을 합하여 판옥선 55척, 거북선 3척 등 58척의 전선으로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다시 경상도 바다로 출전하였다. 7월 7일, 동풍이 크게 불어 항해하기가 어려웠다. 저녁때에 당포에 도착하여 물 긷고 나무하고 1박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피난하여 산에 올랐던 이 섬의 목자 김천손으로부터 오늘 오후 2시경 적의 대, 중, 소선 70여척이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은 수로가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으로 싸우기가 어려운 곳이므로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쳐 적선을 일시에 깨트릴 작전을 수립하였다.

음력 7월 8일, 양력 8월 14일 한산해전은 시작된다. 견내량에는 김천손의 보고와 같이 대선9아다케036척, 중선9세키부네)24척, 소선(고바야)13척등 7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작전에 따라 투입한 유인선 5,6척을 따라 일본 수군의 전 함선이 일시에 돛을 올리고 뒤쫓아 나왔다. 예견한 대로였다. 뒤?m아 온 적선이 바다 가운데에 이르렀을때 막하 장수들과 논의한대로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지자, 현자, 승자등의 각종 함포를 쏘아 먼저 2,3척을 깨트리자 일본 수군들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여러장수와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돌진하여 화살과 화전을 마구 발사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았다. 이 해전에서 격침 도는 나포된 적선은 59척(대선35척, 중선 17척, 소선7척)이나 되었고 6천에서 9천명정도의 일본 수군이 한산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이렇게 한산도 앞바다는 조선 수군에게는 나라를 구한 승리의 바다, 일본 수군에게는 통한의 바다가 되었다. 겨우 14척(와키자카 아스하루가 승선한 대선 1척, 중선7척, 소선6척만이 도주하였다. 이것이 유인과 포위의 전술 학익진이었다. 와키자키 아스하루가 단독 출전한 것을 알게 된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는 뒤따라 출전하였으나 한산해전에서 와키자키 수군 부대가 이순신 함대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정보를 듣고 이순신 함대를 겁내어 안골포(진해)로 피신하였다.

7월 10일 일본수군이 안골포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듣고 달려가 보니 대, 중, 소선을 합하여 4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안골포는 포구가 좁고 얕아서 그대로 진격할 수 없이 이들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일시에 잡고자 하였으나 일본 수군은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는 작전을 바구어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을 향해 교대로 드나들면서 각종 함포와 장편전 등을 퍼부어 거의 다 격침시켰다. 한산해전과 안골포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79척의 함선을 잃었다.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이 해전에서 19명의 전사자와 114명의 부상자는 있었으나, 단 한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한산해전에서의 패배로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한 일본군은 그들의 뜻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순시느이 작전대로 조선 수군 연합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승리였다.

학익진의 펼쳐라.

이순신은 한산해전을 이긴 후 조정에 보낸 장계에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도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이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 해전하기가 어렵고 또 일본 수군은 전세가 불리하면 육지에 상륙하여 도망 갈 수도 있으므로 한산도 앞바다 한가운데까지 유인하여 때려잡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현 통영)중간에 있는데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어서 상륙하더라도 굶어죽게 될 것이므로(중략) 라고 하여 한산해전을 유인, 매복, 학익진 집중포격, 아사의 단계 작전으로 임했음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먼저 판옥선 5, 6척을 보내어 일본 수군을 한산도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일시에 돛을 달고 ?m아왔다. 이에 이순신의 사전 계획에 따라 유인선이 후퇴하고 견내량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던 주력함대가 거짓 후퇴하자 일본 수군은 기세가 올라 우리 수군을 쫓아 넓은 바다로 나왔다. 조선 수군은 계속해서 도망을 가고 기세가 오른 일본 수군은 맹렬히 추격을 하여 거의 한바다에 이르렀다.

그 대 근처의 방화도와 화도에 매복해 두었던 조선함대가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 쫓기고 있던 우리 전선을 엄호함과 동시에 이순시느이 명령에 따라 선수를 일제히 일분 수군 쪽으로 돌렸다. (기록자 주)그리고는 마치 학이 날개를 펴듯 학익진을 만들어 추격해오는 일본수군을 향하여 먼저 거북선이 돌진하여 적의 진영을 흐트려 놓고 좌충우돌 공격하였다. 지자, 현자, 승자등 각종 총통을 소기 시작하여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일본수군은 겁내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조선 장수와 병사들은 서로 다투어 돌진해 들어가 화살과 탄환을 교대로 퍼부었다. 적은 조선 수군의 집중포격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조선 수군은 삽시간에 적선을 모두 깨뜨리고, 포획하고, 불태웠으며 수많은 일본 수군을 사살하였다.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 수군에게 쫓겨 도망치던 일본 수군 약 400명은 조선 수군에 대항할 수 없어 이순시느이 예상대로 배를 버리고 한산도로 올라갔다. 그날 종일 접전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피곤하데다가 날이 어두워져 궁한 적을 더 쫓지 않고 견내량 한 쪽 바다에서 밤을 새웠다.

다음날 7월 9일에는 적선을 찾아 가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떼 일본 수군장수 구키 요시다카, 가토 요시아키의 42척이 단독 출전한 와키자카아스하루 수군부대를 뒤따라 출전하였다. 하지만 와키자카 수군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함대를 겁내어 안골포로 피신하였다. 그것이 조선의 척후 선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날이 곧 저물고 바람도 거세 온천량에서 밤을 새웠다. 7월 10일 새벽, 안골포로 출동하여 그곳에 정박하고 있던 42척의 적선 대부분을 격침시켰다.

한산대첩의 결과

한산해전은 제 1, 2차 출동 76번의 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싸움이었다. 포구에 정박하여 노략질에 정신이 팔려있는 일본 수군을 찾아내어 기습작전으로 펼쳐졌던 전투에서 일본 수군 중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한 정규군과의 전면전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그리고 거북선과 판옥선, 그리고 각종 총통으로 무장한 사기충전한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일궈낸 큰 승리였다. 패배한 일본군은 앞으로 이순신 함대와는 싸움을 피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철저히 조선함대와는 정면 대경르 피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을 만나면 빠른 속도로 후퇴하거나 드세게 추격해오면 함선을 버리고 육지로 피신해 버렸다.

9월 1일,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일본군의 본거지 부산포를 종일 공격하여 500여척의 적선중 100여척을 분멸했다. 이때 일본군은 함선을 듸워 직접 해전을 벌리지 못하고 산등성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조선함대를 내려보며 총통과 조총을 쏘는 등의 소극적인 전술로 대항했다. 조선함대에는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산대첩은 조일전쟁 초기 육전에서의 승리로 의기양양 하던 일본군의 기세를 여지없이 꺾어놓음으로서 일본군이 더 이상 그들의 작전대로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만든 해전이었다. 일본군의 이 해전을 통하여 조선의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한 후, 서해로 진출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와 합류하여 명나라로 진격하려던 당초의 계산이 무산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서해 진출이 무산되어 보릅로를 확보하지 못해 애써 점령한 평양과 조선의 수도 한양을 포기하고 남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승첩이었다.

한산대첩 이후의 이순신 장군의 행적

전라 좌수영 여수에서 부산을 적을 치기에는 너무 멀었다. 이순신은 징계를 올려 '여수에서 부산에 있는 적을 치기에는 너무 멉니다. 적이 남해를 침범하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견내량을 비켜낼 수 있는 한산도로 진으 옮겨 전진기지로 삼고자 합니다.' 라는 요지의 징계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일본 수군이 남해로 침입해 오던지 또는 조선 수군이 적이 있는 부산으로 갈려고 하면 최단거리로 반드시 견내량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1593년 7월 14일, 한산도(통영)로 진을 옮겨 전진 기지로 삼았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8월1일자(조선 수정실록)로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돗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임명교서는 10월 9일 한산도 진영에서 받았다. 한산도에서 3년 8개월 동안 삼도수군 통제사로 재직하면서 남해를 침범하려는 일본군을 무찌르는 한편 전력증강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다. 일본과 명나라가 서로의 이익을 넘보먀 강화교섭을 벌이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교섭은 결렬되었다. 1597년 2월 1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총병력 14만 1천 5백명으로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2월 26일 이순신 장군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투옥된다.